진변 칼럼

중년살이의 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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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2학년 축제 마지막 전야, 단벌 양복과 노란 와이셔츠를 드라이 하고 머리도 손질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친구가 과연 어떤 파트너를 데리고 올지, 그녀가 마음에 들지, 마음에 든다면 어떻게 꼬실지 꿈꾸느라 잠을 뒤척였다. 그런데 자고 나니 세상이 바뀌었다. 전국이 비상사태에다 대학 휴교령이 내렸다. 밤새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살해된 것이다. 1979년 10월 26일 밤이었다.

 

그로부터 31년이 흘렀다. ‘박정희가 죽으면서까지 나의 대학생활의 낭만을 빼앗아가는구나!’ 하고 푸념하던 그 청년도 어느새 50이 넘은 중늙은이가 되었고 10.26 당시의 그보다 더 나이 많은 두 아들도 두었다. 큰 놈은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며 낑낑대고 있고, 해병대에 자원입대하여 자신을 달구어 오겠노라고 큰소리치던 작은 놈은 상병이 되었는데도 정신적으로 더 피곤하다고 앙앙거린다.

 

그사이 아버지는 췌장암으로 진단받으신지 6 달 만에, 어머니는 뇌졸중으로 쓰러지신지 5 년 만에 돌아가셔서 그도 늙은 고아가 되었다. 중년살이의 대열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이다. 중년의 삶은 청년의 삶과 많이 다르다.

 

중년에는 세월이 점점 빨라진다. 다음날 만나게 될 파트너가 어떤 모습일까 하면서 가슴 설레던 31 년 전 가을밤이 바로 엊그제 같다. 독일유학시절 칠십을 바라보던 집주인 바요라트 할아버지가 그 크고 허연 오른손을 권총모양으로 자신의 오른쪽 관자놀이에 대면서 '지금도 마음은 18세 청춘!'이라고 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세월은 나이에 비례해서 빨리지나간다고 했던가! 벌써 손자 손녀를 본 친구들도 더러 있다. 주례부탁도 더러 받는다.

 

중년에는 선악구분이 잘 안 된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 다만 영원한 이익만이 있을 뿐이다! 정치인이 아니라도 이해관계에 따라 배신하거나 적과의 동침을 마다 않는다. 그래서 거짓말도 대수롭지 않게 한다. 어느 봉사단체 회장이 멀끔히 찾아와서 '형님, 다음 달에 갚을 테니 천 만 원만 빌려 주소!' 하더니 일주일도 안 되어 그 단체 공금까지 챙기어 필리핀으로 도망가는 일도 겪었다.

 

중년에는 죽음이 점점 더 빨리 다가온다. 부모를 여윈 늙은 고아가 태반이고 심지어 자식과 아내를 앞세운 친구도 있다. 망자(亡子)가 부모 등 한 세대 위에서 같은 세대로 이동 중에 있고, 이동의 속도와 폭이 완연히 빨라진다. 장례식은 결혼식과 달리 부조금으로 대체불가능하다. 그래서 더 자주 간다. 갈 때마다 상주의 슬픔에 공감하기보다 죽음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새삼 느낀다. 죽음이야 말로 새로운 생명탄생의 근원이다. 죽음이 없는 영원한 삶은 얼마나 힘겨울지, 그래서 인간에게 탄생과 더불어 죽음을 선물한 조물주의 지혜에 고마움을 느낀다.

 

어떤 사회든지 주요한 역할은 거의 중년이 차지한다. 그런데 어렵게 성취한 현재의 자리에서 하루아침에 몰락하는 것도 중년이다. 공든 탑도 무너진다. 시쳇말로 한방에 훅 간다. 대한민국 신문사회면은 정치학, 철학, 종교학의 절절한 체험 학습교재이다. 한 인간의 부침이, 주로 몰락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청정해역 우리거제에도 중년들의 부패스캔들이 끝없이 터져 나온다. 돈 공천 추문(醜聞)으로 얼룩졌던 6.2지방선거의 후유증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공천신청도, 공천도, 출마도, 당선도 다 남자들이 했건만 피고인석에는 여자들만이 서있다. 그 모순되는 현실에서 인간의 탐욕과 야비함을 느낀다. 모순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아버지가 현직 대통령일 때 부패혐의로 구속되어 징역을 살았고, 17대 총선 때 무소속 출마과정에서 그의 운동원들이 돈을 뿌리다 구속되었으며, 얼마 안 되어 또 한 차례 구속되어 수사과정에서 억울하다며 자해소동을 벌였으나 유죄확정판결을 받은 김현철씨가 다시 거제로 내려온단다. 목표는 1년 반 뒤의 총선고지 정복이고 당면 표적은 윤영의원의 탈당에 대비한 한나라당 거제지구당 조직접수를 위해서란다. 결국 부패가 더한 부패세력을 불러들이는 꼴이다. 이러한 모순의 극단이 우리 거제의 엄연한 정치현실이다.

 

‘인생에 정답이 없다. 그것만이 유일한 정답이다.’라고 했던가! 인간은 그 진실된 모습이 아니라 남에게 보여진 것으로 평가된다. 그래서 ‘쇼(show)를 하라’는 광고 카피가 인기를 끈다. 그래도 아이들에게는 정직하게 살아야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을 먼저 정직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마크 트윈은 갈파(喝破)했다.

 

나는 결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할 수 없다. 이른 아침 계룡산 너머 거제만에 비치는 만추의 햇살을 바라보면서 인기 드라마 「대물」의 주인공 서혜림의 이상정치(理想政治)를 현실에 조금이라도 접목시킬 수 있는 발걸음 하나 내딛자고 다짐해본다. 다시 마음을 다잡아 부패에 찌든 이 나라, 이 지역 정치현실의 개혁을 위해 조그만 벽돌하나 놓으리라!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줄기 일자진(一字陣)으로 적을 맞으리!’라고 했던 이순신 장군의 절규가 귓가에 쟁쟁하다. 다시 옷깃을 여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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